차승언(CHA Seung Ean, 1974-)은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한 전후 추상미술의 유산을 되돌아보며 회화의 현상학적 존재와 그 본질을 탐구한다. 그는 캔버스의 직조를 통해 ‘회화의 조건을 가시화하는 회화’를 성찰하려는 충동을 드러내는데, 이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근년에야 나타난 현상이다.

2012/2013년 이후 ‘회화의 기저에서 환영과 실재의 차원을 새로이 재구성하겠다’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고, 근년의 작업에선 지난 시대의 대가와 그들의 작업에서 느낄 수 있던 어떤 현대적 풍치(風致)마저 감지된다. 그 현대성 비스무레한 감각은, 의태(mimesis) 혹은 의태의 소산(또는 부작용)에 불과하겠으나, 특유의 즉물적 생생함을 통해 시대성을 결여한 좀비-모던의 시대에 비평적으로 부합한다.

차승언의 작업이 지니는 특징은, 직조 행위를 참조적 전유(referential appropriation)의 메소드로 삼아, 인용되는 것과 인용하는 주체 사이의 거리를 표지하고, 그를 통해 현상학적 현대성을 메타 차원에서 의태-갱신해내는데 있다. 이 과정에서 긴요한 것은, 전유하는 약탈자의 자세—이른 바 ‘그림들 세대(Pictures Generation)’의 작업 태도에서 두드러졌던—가 아니라, ‘과거’와 ‘인용된 과거’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 혹은 확보하는 시공간 감각이다.